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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시리즈 04] 사피엔스의 과학혁명 (ft. 유발 하라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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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시리즈 04] 사피엔스의 과학혁명 (ft. 유발 하라리)

Praiv. 2022. 12. 1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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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시리즈 목록

[사피엔스 시리즈 00] 호모 사피엔스, 다음은 무엇인가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1] 사피엔스의 인지혁명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2] 사피엔스의 농업혁명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3] 사피엔스의 인류 통합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4] 사피엔스의 과학혁명 (ft. 유발 하라리)

 

 

 

인지혁명, 농업혁명을 통해 인류의 대규모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비교적 최근들어 발생한 세 번째 혁명은 과학혁명이다.

과학혁명이 단순히 지식의 혁명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관점의 혁명, 즉 ‘이그노라무스(ignoramus) -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무지의 혁명이었다.

 

#01. 무지의 혁명

무지를 인정한다는 게 왜 그리 중요할까?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각종 종교들, 이슬람, 불교, 기독교 등은 인류가 이미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단언했다.

성경, 베다, 코란에 빠져있는 지식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성인들이 해결하지 못한 기근, 가난, 전쟁, 죽음등의 문제는 인류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 단언해왔다.

이카루스 신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망과 좌절을 가져올 것이라고 여겨왔다.

 

상황이 바뀐 것은 과학이 발전하며 인류가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던 문제들을 하나 둘 씩 해결되가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신의 분노로만 여겨지던 번개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

인류는 곧이어 새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어떤 문제든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은 그저 우리의 무지 때문이었다.

무지를 인정하자 인류는 앞으로 알아내야할 지식이 많이 있고 이를 발견해나가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

 

#02. 과학과 제국

무지를 인정한 과학은 제국과 만나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둘이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공통점은 이들의 생각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둘 다 “우리는 저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과학자들은 앞으로 발견할 새로운 지식을 찾아 나섰고 정복자들은 앞으로 발견할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섰다.

 

여러 제국주의들 중 이러한 관점은 유럽 제국주의에서만 보이는 점인데

로마, 몽골 등의 다른 제국주의는 새 땅을 정복하는 목적이 새 권력을 얻기 위함이지 새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생각이 비슷한 것 이외에도 이 둘은 서로 윈윈하는 관계였다.

과학자들은 정복자들에게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제공했고

정복자들은 과학자들에게 신변의 보호, 과학적 사고방식의 전파,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제공했다.

 

#03. 과학과 자본주의

#03.01. 자본주의, 신용

과학혁명이 자본주의와 만나자 또 하나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경제 시스템에 ‘신용’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신용이란 미래에 발생할 가치를 미리 땡겨쓰는 것인데 이것이 실현되려면

현재보다 미래에 우리의 삶이 더 발전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우선해야 한다.

 

과학혁명 이전의 인류는 미래보다 현재가 더 낫다고 여겼다.

에덴동산 등 찬란했던 영광은 과거에 이미 존재했었기에 현재 우리에게 남은 것은 현상유지 혹은 더 안 좋아질 미래밖에 없었다.

현재보다 미래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과거에는 돈을 투자하기 보다 사치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했었다.

어차피 투자해봤자 더 좋아질 것도 없는데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학혁명은 인류에게 지금껏 무지해왔음을 깨닫게 하고 현재의 투자가 미래에 더 큰 보상으로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생산 시설이 늘어날수록 다음 해에 얻는 수확이 더 많아졌다.

경제는 신용이라는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 사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궤도로 들어선다.

 

#03.02. 소비지상주의

현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생산하고 재투자하는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라는 용어에서 ‘돈’이라는 단어 대신 ‘자본’이라는 말을 쓴 것은 바로 이러한 재투자를 통한 성장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자본이란 생산에 재투자되는 돈과 재화를 의미한다. 돈을 투자하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는 사람은 부자일순 있어도 자본가는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생산해도 누군도 사주지 않는다면 생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비를 부추기는 윤리, 소비지상주의다.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동안 인류는 결핍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검약이 윤리였지만

과학혁명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윤리가 되었다.

 

소비지상주의는 이윤을 소비하라는 사상이고

자본주의는 이윤을 소비하지 말고 재투자하라는 사상인데

얼핏 보면 정반대인 이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싶다.

 

하지만 답은 이미 현대인들의 모습 속에 보여지고 있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반면

그만큼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어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TV와 자동차를 산다.

 

부자들이 이윤을 투자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이윤을 소비하고 있다.

과거 귀족들이 돈을 사치에 흥청망청 썻던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아꼈던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정반대의 사회 시스템이 구성된 것이다.


#04. 가족 공동체의 해체

과학혁명은 사회 공동체의 변화도 가져왔다.

이전에는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중심이었지만 사회가 산업화되고 개인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 시스템이 발전하자 가족은 핵가족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낭만주의는 개인을 중시하면서 가족 등의 공동체 대신 개인 스스로를 더 중시하도록 만들었다.

 

국가와 시장은 이러한 공동체의 균열을 파고들었다.

국가는 각종 제도등을 통해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주었고 시장은 개인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한 개인이 좋든 싫든 생존을 위해 가족 공동체에 머물 수 밖에 없었지만

과학혁명 이래로 점점 더 사람들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과학혁명이 제국, 자본주의와 맞물려 인류의 폭발적인 성장과 개인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를 가져왔지만

이것들이 개개인의 행복을 반드시 증진시켰다고 보긴 어렵다.

물질적인 풍요는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지만 공동체와 가족의 해체 등 주관적인 요소들은 분명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물질적인 풍요가 이루어진다 할지라도(심지어 죽음이 정복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 개개인의 행복과 함께할지는 앞으로 고민해보아야 할 숙제이다.

 

역사는 인간 개개인의 행복을 중점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행복을 기준으로 역사를 보려는 시도도 이제 막 시작하는 참이다.

 

죽음이 정복되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사람들과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들은

현재의 과학혁명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패러다임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05. 호모 사피엔스, 그 이후의 존재

이 다음 패러다임은 무엇이 될까?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종말이 아닐까?

 

생명과학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우리가 새롭게 알아내는 과학적 지식은 날마다 쌓여간다.

죽음을 피하려고 했던 길가메시는 결국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수긍했지만

현대 과학자들은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계속해서 찾아내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 다음 종으로 크게 3가지를 예상해볼 수 있다.

  1. 생명공학은 생물학의 수준에서 유전자 조작등을 통해 인간이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2. 사이보그공학은 신체의 일부를 무생물적 요소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안경이 대표적인 예이다.
  3. 비유기물적공학은 인간의 의식 자체를 컴퓨터 등에 업로드하여 비유기물적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존재가 변한다면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지적설계가 정말로 실현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도 원하는대로 설계할지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 다음 종이 어떤 존재일지는 우리의 상상 밖이고 이후 어떻게 진화(분화)할지도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 진화의 결과물이 창조자의 가족과 친구를 죽인 프랑켄슈타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시도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러다이트 운동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은 지속되었고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에도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질병과 죽음의 정복이라는 표면적인 목표 아래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길가메시의 걸음을 막을 수 없다면 그의 등 뒤에 올라탄 프랑켄슈타인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가?

 

그 질문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원할 것인가?

 

 

 

 

발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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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발견

p356-357)

적어도 인지혁명이 일어난 이후부터 인류는 우주를 이해하려 애썼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을 발현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ignoramus) - 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무지를 인정한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새 힘의 획득. 현대 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한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이슬람, 기독교, 불교, 유교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고 단언했다. 위대한 신들, 혹은 전능한 유일신, 혹은 과거의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가 있었고, 그것을 문자와 구전 전통을 파고들어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지식을 얻었다. 성경이나 코란, 베다에 우주의 핵심 비밀이 빠져 있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피와 살을 가진 피조물들이 앞으로 발견할지도 모르는 비밀이 말이다.

 

p374-375)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인류문화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황금시대는 과거 있었고, 세상은 퇴화하지는 않더라도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지혜를 엄격히 추종한다면 좋았던 옛 시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고 인간의 창의성으로 일상생활의 이런저런 측면을 개선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지식으로 세상의 근본 문제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마호메트나 예수, 부처와 공자는 세상의 중요한 일은 뭐든지 알고 있는 존재였다. 만일 이들조차 기근과 질병, 가난과 전쟁을 세상에서 몰아낼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겠는가? 언젠가 구세주가 나타나서 세상의 전쟁과 기근과 심지어 죽음을 끝내리라고 믿는 신앙은 많았지만, 인류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새 도구를 발명함으로써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터무니없었다. 그것은 오만이었다. 바벨탑, 이카루스, 골렘 이야기를 비롯해 수많은 신화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실망과 좌절을 부른다고 가르쳤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난, 질병, 노화, 죽음은 인류의 피치못할 운명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무지가 낳은 결과였다.

 

과학과 제국의 결혼

p399)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p401)

무엇이 현대 과학과 유럽 제국주의 사이의 연대를 구축했을까? 19세기와 20세기에는 기술이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근대 초기에는 기술의 중요성에 한계가 있었다. 핵심요인은 식물을 찾는 식물학자와 식민지를 찾는 해군장교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데 있었다. 과학자와 정복자는 둘 다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들은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들은 둘 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겠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새로운 지식이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기를 둘 다 희망했다.

 

p401-402)

유럽 제국주의는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모든 제국주의 프로젝트들과 완전히 달랐다. 과거의 제국 추구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복은 단지 ‘그들의’ 세계관을 활용하고 퍼뜨리는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아랍인들은 이집트나 스페인 혹은 인도를 정복했지만,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따. 로마인, 몽골인, 아즈텍인들이 탐욕스럽게 새 땅을 정복한 것은 권력과 부를 찾아서였지, 새 지식을 찾아서는 아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새 영토뿐 아니라 새 지식을 획득한다는 희망을 안고 먼 곳의 해변을 향해 떠났다.

 

p419) 최근 러-우 전쟁도 이와 비슷한 느낌 아닌가?

비유럽 문화권들이 진정 세계적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는 유럽이 헤게모니를 잃게 된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에서 알제리 게릴라들은 압도적인 수적, 기술적, 경제적 우위를 점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알제리인들이 승리한 것은 전 지구적인 반식민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었으며, 전 세계 미디어를 동원해 자신들의 명분을 알리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프랑스 자체 내의 여론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줄 알았다.

 

p429)

과학자들은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실용적 지식,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기술적 장치를 공급했다. 이런 기여가 없었다면 유럽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정복자들은 과학자들에게 정보와 보호를 제공하고, 온갖 종류의 이상하고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지구 구석구석에 과학적 사고방식을 퍼뜨림으로써 보답했다. 제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근대 과학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과학 분야 중에 제국주의적 성장의 하인으로서 삶을 시작하지 않은 분야, 육군 장교와 해군 함장과 식민지 총독의 넉넉한 지원에 대부분의 발견과 수집과 건물과 연구 자금을 빚지지 않은 분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의 교리

p431)

돈은 제국 건설과 과학 진흥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돈이 이 모든 일의 궁극적 목표일까, 아니면 단지 위험한 필수품일 뿐일까? 근대사에서 경제의 지정한 역할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어떻게 돈이 국가를 세우고 망하게 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수백만 명을 노예로 만들고, 산업의 바퀴를 돌리고, 동식물 수백 종을 멸종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해 기술한 두꺼운 책은 많다. 하지만 근대 경제사를 알기 위해서 정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성장’이란 단어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근대 경제는 마치 호르몬이 넘쳐나는 십대처럼 성장해왔다.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늘 몇 센티미터 더 많이 자랐다.

 

p435-436)

빵집이 없으면 케이크를 구울 수가 없고, 케이크가 없으면 돈을 벌 수 없으며, 돈이 없으면 도급업자를 고용할 수 없고, 도급업자가 없으면 빵집도 없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경제는 얼어붙어 있었다. 이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발견되었다. 미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한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이 시스템 내에서 사람들은 ‘신용’이라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돈이 상상 속의 재화 - 현재 존재하지 않는 재화 - 를 대표하게 하는 데 동의했다. 신용은 미래를 비용으로 삼아 현재를 건설할 수 있게 해준다. 신용은 우리의 미래 자원이 현재 자원보다 훨씬 더 풍부할 것이라는 가정을 토대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미래의 수입을 이용해서 현재에 무엇을 건설할 수 있다면, 새롭고 놀라운 기회가 수없이 많이 열린다.

 

p436)

만일 신용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라면, 어째서 아무도 좀 더 일찍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물론 과거에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신용 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시대보다 과거가 더 좋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쁘거나 기껏해야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경제용어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부의 총량이 더 줄지는 않다라도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p442-443)

모든 투자는 어떻게 해서든 생산을 늘려야 하고 더 많은 이윤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새로운 자본주의 교리에서 가장 신성한 제1계율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단순한 ‘부’와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재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땅에 붙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낭비된다. 비생산적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붓는 파라오는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스페인의 보물선단에서 약탈한 금화를 상장에 담아 카리브해의 어느 섬에 묻어둔 해적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수입의 일부를 주식시장에 투자한 공장 노동자는 자본주의자다.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에 재투자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생산이 어느 정도 일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생산이 크게 늘지 않을 텐데 왜 이윤을 재투자하겠는가? 그래서 중세 귀족은 관대함과 과시적 소비라는 윤리를 신봉했다…

근대에 이르러 귀족은 자본주의 신조를 믿는 새로운 엘리트에게 추월당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자 엘리트는 공작이나 후작부인이 아니라 회장, 주식 거래인, 기업경영자로 구성되어 있다.

 

산업의 바퀴

p480)

산업혁명의 핵심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산업혁명은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일한 한계는 우리의 무지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불과 몇십 년마다 새로운 에너지원이 발견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계속 늘었다. 그런데도 에너지 고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용 가능한 화석연료가 고갈되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세상에는 에너지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에너지를 찾아내 그것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전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다.

 

p490)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군가 제품을 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할 것이다. 이런 파국을 막으면서 업계에서 생산하는 신제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검약이 표어였다.

 

p493)

소비지상주의 윤리와 사업가의 자본주의 윤리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후자에 따르면 이윤은 낭비되어서는 안 되고 생산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는 노동의 분업이 존재한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값비싼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썼지만, 농부들은 한 푼 한 푼을 아끼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데 반해, 그만큼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TV를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끝없는 혁명

p497)

사피엔스는 자연의 변덕으로 인한 영향은 점점 더 적게 받게 되었지만 현대 산업과 정부의 명령에 점점 더 많이 복종하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결과 사회공학적 실험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일상과 인간 심리 면에서 예기치 못했던 변화는 더 길게 이어졌다. 많은 변화 중 한 예는 전통농업의 리듬이 산업의 획일적이고 정밀한 스케줄로 대체된 것이다.

 

p506-507)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와 시장은 점점 커지는 권력을 이용해 가족과 공동체의 전통적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국가는 가족 간 피의 복수를 경찰을 보내 막았고 법원의 판결로 대체했다. 시장은 지역의 오랜 전통을 장사꾼을 보내 일소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행위 관습으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가족과 공동체의 힘을 약화시키려면 제5열(스파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국가와 시장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말했다. “개인이 되어라. 누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라…”

낭만주의 문학은 곧잘 개인을 국가와 시장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사실 이보다 진실에서 먼 이야기는 없다. 국가와 시장은 개인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들 덕분이다. 시장은 우리에게 직업과 보험과 연금을 제공한다.

 

p509-510)

현대사회에서도 핵가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와 시장은 경제적, 정치적 역할의 대부분을 가족에게서 뺴앗으면서도 일부 중요한 감정적 기능은 남겨두었다. 현대 가족은 국가와 시장이 (아직은)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은 심지어 이 영역에서도 점점 더 많은 개입을 겪고 있다. 시장이 사람들의 연애 및 성생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가족이 중매쟁이의 역할을 맡았지만, 오늘날 연애와 성적 선호를 조종하고 그것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장이다.

 

p511)

핵가족도 그렇지만 공동체 역시 아무런 정서적 대체물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오늘날 시장과 구가는 과거에 공동체가 제공하던 물질적 필요의 대부분을 충족시켜주고 있지만, 이와 함께 같은 부족민 사이에 느끼던 유대감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시장과 국가는 ‘상상의 공동체’를 육성함으로써 그 일을 해낸다.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을 포함하는 이 공동체는 국가적, 상업적 필요에 맞게끔 만들어졌다. 모든 상상의 공동체는 실제로 서로 알지는 못하지만 서로 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이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왕국, 제국, 교회는 상상의 공동체로 수천 년씩 기능해왔다.

 

p514)

최근 몇십 년간 국가 공동체는 소비자 집단에 의해 점점 더 빛을 잃어왔다. 소비자 집단은 서로 직접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비 습관과 관심이 동일하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동일한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끼며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p539-540)

지난 2세기 동안 물질적 조건이 크게 개선된 효과가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로 상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평균적 사람이 1800년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자유조차 나쁘게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배우자와 친구, 이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이 각자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데 전례 없이 큰 힘을 누리게 되면서, 우리는 남에게 헌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되고 다들 점점 더 외로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행복이 부나 건강, 심지어 공동체 같은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손수레를 원해서 손수레를 얻었다면 만족하지만, 새 페라리를 원했는데 중고 피아트밖에 가지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p540)

인간의 기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행복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일 행복이 부나 건강, 사회관계 같은 객관적 조건에만 좌우된다면, 행복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행복이 주관적 기대에 좌우된다는 발견은 역사학자의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현대인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제와 진통제가 얼마든지 있지만, 안락함과 즐거움은 더 크게 기대하면서 불편함과 불쾌함은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가 선조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p543)

현실이 그와 같다면,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느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버뮈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 대다수의 사람 - 들은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오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p560)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여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p564)

세계의 생물학자들은 도처에서 지적설계(창조론) 운동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가르치는 데 반대하는 지적설계 운동의 주장에 따르면, 생물학적 복잡성은 모든 생물학적 세부사항을 미리 생각해낸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과거에 대해서는 생물학자들이 옳지만, 미래에 대해서라면 역설적으로 지적설계 옹호자들이 맞을지 모른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자연선택을 지적설계로 대체하는 일이 진행 중일 수 있다. 그 방법은 세 가지인데 첫째가 생명공학, 둘째가 사이보그 공학(사이보그는 유기물과 무기물을 하나로 결합시킨 존재다), 셋째가 비유기물공학이다.

 

p565)

생명공학은 생물학의 수준에서 인간이 계획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예컨대 유전자 이식).

 

p572)

사이보그는 생물과 무생물을 부분적으로 합친 존재로, 생체공학적 의수를 지닌 인간이 그런 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거의 모두가 생체공학적 존재다. 타고난 감각과 기능을 안경, 심장박동기, 의료보장구 그리고 컴퓨터와 휴대전화(우리의 뇌가 지고 있는 자료 저장 및 처리의 부담 일부를 맡아준다)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사이보그가 되려는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 이 선을 넘으면, 우리는 신체에서 떼어낼 수 없으며 우리의 능력, 욕구, 성격, 정체성이 달라지게 하는 무기물적 속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p576-577)

생명의 법칙을 바꾸는 제3의 방법은 완전히 무생물적 존재를 제작하는 것이다. 대표적 예는 독립적인 진화를 겪을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컴퓨터 바이러스다. 유전적 프로그래밍은 컴퓨터 과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분야로서, 유전자의 진화를 모방하려 노력하고 있다. 많은 프로그래머가 창조자에게서 완전히 독립적 상태로 학습, 진화할 능력을 갖춘 프로그램을 창조하는 꿈을 꾼다. 이 경우 프로그래머는 원동력이자 최초로 움직인 자가 되겠지만, 그 피조물의 진화는 아무 방향으로나 자유롭게 이뤄질 것이다. 프로그램 작성자를 포함해 어느 누가 마음속에 그렸던 방향과도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p581)

미래 기술의 진정한 잠재력은 호모 사피엔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수송 수단과 무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욕망까지 말이다. 영원히 젊은 사이보그에 비하면 우주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이보그가 번식도 하지 않고, 성별도 없으며, 다른 존재들과 생각을 직접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집중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인간의 수천 배에 이르며,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과학 소설이 이런 미래를 그리는 경우는 드문데, 왜냐하면 정의상 정확한 묘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해 불능인 것이다. 어떤 슈퍼사이보그의 삶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네안데르탈인 관객을 위해 연극 <햄릿>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우리와 미래의 주인공들의 차이는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의 차이보다 더욱 클 것이다. 적어도 우리와 네안데르탈인은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의 후계자들은 신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p585)

만일 사피엔스의 역사가 정말 막을 내릴 참이라면, 우리는 그 마지막 세대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는 데 남은 시간의 일부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인간 강화’ 문제라고도 불리는 이 질문에 비하면 오늘날 정치인이나 철학자, 학자, 보통사람 들이 몰두하고 있는 논쟁은 사소한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종교, 이데올로기, 국가,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과 함께 사라질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p586)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과학의 주력상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다. 길가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이들이 가고있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사피엔스 시리즈 목록

[사피엔스 시리즈 00] 호모 사피엔스, 다음은 무엇인가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1] 사피엔스의 인지혁명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2] 사피엔스의 농업혁명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3] 사피엔스의 인류 통합 (ft.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시리즈 04] 사피엔스의 과학혁명 (ft. 유발 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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