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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움] 현대인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 (ft. 문요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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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움] 현대인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 (ft. 문요한)

Praiv. 2022. 12. 1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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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이 마음

자도 자도 피곤하다. 무엇을 해도 재미있지 않다.

주말만 기다리며 5일을 버텼는데 막상 주말만 되니 잠만 자고 괜히 더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

 

일주일간 열심히 일한 보상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울수가 없다.

이런 느낌이 싫어 괜히 또 기분이 안좋아지고 우울해진다.

 

살면서 이런 경험.. 다들 한 번씩은 있지 않을까?

종종 혹은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런 순간들은 현재의 내 모습을 잿빛으로 만드는 것 같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것 같은데 왜 이러지.. 라는 생각이 들 때

[오티움] 이라는 책을 꺼내보길 추천한다.

 

오티움 - 문요한

 

#02. 오티움이란?

‘오티움’ 이란 라틴어로 여가 시간을 뜻한다. 반대 의미로 ‘네고티움’은 여가 외 시간을 말한다.

신기하게도 라틴어에는 ‘일’을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

 

일부 귀족층들의 이야기이긴 하겠지만 (일은 노예가 하니까 ㅎㅅㅎ)

과거 사회는 일 중심의 현대 사회와는 다르게 여가 중심의 사회가 있었던 듯 하다.

 

책에서 ‘오티움’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게 된 건

일 중심의 사회에서 여가의 중요성, 그것도 제대로 된 여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더 행복한 것은 더 잘 놀기 때문이다.

이말은 바꿔 말하자면 어른들도 잘 놀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죽했으면 정신과 의사였던 도널드 위니캇은 심리치료의 목표를 ‘놀지 못하는 상태에서 잘 노는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 라고 정의했을까.

 

여가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어른들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놀 줄 알아야 행복해 질 수 있다.

 

“나는 이미 여가 시간을 갖고 잘 즐기고 있는데?”

“나는 쉬는 시간에 보고 싶은 TV도 보고 잠도 실컷 자는데?”

라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휴식도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보고 싶은 것 다 보았는데도

생활은 종종 무료하고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휴식, 즉 ‘오티움’이 필요하다는 시그널이다.

오티움은 그냥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내야 한다.

 

"안그래도 내 일상은 팍팍한데, 여기다 쉬는 시간까지 노력하라고?"

라고 이젠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쉬었던 쉼이 만족스러웠는지.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중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는 것이 중요했다.

육체적 피로가 많이 쌓였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의 현대 직장인들은 육체적 피로보단 정신적 피로가 훨씬 더 많이 쌓인다.

그렇기에 단순히 육체적 쉼을 가진다고 해서 피로가 풀리고 재충전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나를 위한 시간, 오티움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정신적 피로를 풀고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03. 오티움의 기준

오티움은 '무위'의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목표만 바라보고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것은 오티움이 아니다.

그리고 매일, 매주 혹은 정 안되면 매달 한번이라도 일정한 루틴을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긴 시차를 두고 단발성으로 다녀오는 여행은 오티움이 아니다.

 

재미있는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것은 휴식이 될 순 있어도 오티움이 될 순 없다.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것이 오티움이 되려면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관련 포스팅을 한다거나 공부를 하고

전시회를 찾아 다니고 영화 관련 모임을 나가는 등 주도적인 활동이 포함되어야 한다.

 

책에서 말하는 오티움의 기준 5가지는 아래와 같다.

  1. ‘자기 목적적’이다.
    • 결과나 보상에 상관없이 그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자기 목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티움은 좋아서 하는 활동이다. 즉, 오티움은 활동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지 결과나 보상 때문에 기쁜 게 아니다.
  2. ‘일상적’이다.
    • 아무리 좋아하는 여가 활동이어도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활동은 오티움이 아니다. 오티움은 매일, 매주 혹은 최소 매달이라도 일상에서 즐기는 여가 활동을 말한다.
  3. ‘주도적’이다.
    • 독서, 감상, 묵상처럼 정적 활동 또한 얼마든지 올티움이 될 수 있다. 오티움의 능동성에 있어 중요한 기준은 주도성이다. 이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선택하고 즐기고 배우고 심화시켜 가는 것을 말한다.
  4. ‘깊이’가 있다.
    • 몇 개월 하다가 그만두는 여가 활동은 오티움이 아니다. 오티움은 지속성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오티움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는 ‘배움의 기쁨’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오티움은 기술, 전문 지식, 능동적 감상, 창조적 경험 등을 통해 깊이를 더해간다. 그렇기에 쉽게 싫증이 나지 않고 즐거움을 배가시키며 지속할 수 있다.
  5. ‘긍정적 연쇄효과’가 있다.
    • 아무리 위의 네 가지 기준을 만족하더라도 긍정적 연쇄효과가 없으면 오티움이 아니다. 오티움은 중독과 구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오티움은 그 활동만 기쁜 게 아니라 그 활동으로 인한 기쁨이 확산되어 삶과 관계에 활기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04. 슬럼프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오티움을 실천하다가 힘이 들거나 슬럼프에 빠진다면 잠시 쉬어도 된다. 사실 슬럼프가 온다는 것은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당연하 수순이기 때문에 잘 하고 있다는 시그널이지만 그럼에도 진척이 안되는 느낌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잠시 쉬어도 된다.

 

책에서는 이외에도 '관찰하기', '위로와 격려', '변화의 추구', '회고하기' 를 슬럼프 극복 방법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개인적인 경험상 하고 싶은 것들이 여러 개 있어서 하나를 하다가 약간 지루해졌다 싶으면 다른 것들을 하고 다시 돌아온다.

그럴 때면 그 동안 쿨타임(?)이 차서 지루했던 것들이 다시 재미있게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자신의 오티움이 맞았다면 한달 혹은 일년 뒤 어느 순간에 다시 떠오르게 된다.

오티움은 잠시 멈출 순 있어도 그 불씨까지 꺼지진 않기 때문이다.

 

#05. 나의 오티움

나의 오티움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세히 돌아보거나

자신이 구독하고 있는 채널, 자주보는 TV 드라마 등 현재에 이미 녹아들어 있는 자신의 오티움을 찾아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문돌이이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정치’과목 중간고사를 하루 앞두고

친구에게 생물책과 화학책을 빌려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정치는 너무 공부하기 싫었고 옆 친구의 생물과 화학책은 너무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등학교 1학년 말 문/이과를 선택할 시점에 나는 이과를 선택하기로 마음 먹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수학, 과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과외 선생님의 회유(?)로 "이과생을 다스리는 문과생"이 되고자 문과를 선택했다.

정작 대학교 땐 교차지원(문과 -> 이과)으로 컴퓨터학과를 왔지만 말이다..ㅎ

 

현재 나의 유튜브 구독 채널 중 다수를 차지하는 주제 중 하나가 과학이다.

밤에 잠을 잘 때면 과학과 우주 이야기를 하는 강의를 틀어놓고 잠에 든다.

어젯밤에 자면서 들은 건 한국의 달 탐사 역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누리호가 17일인 오늘 달의 궤도 진입을 시도한다고 하는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06. 2023 오티움

이러한 증거들을 가지고 나는 2023년 한 해 동안 나의 오티움으로 수학, 과학 공부를 선택했다.

매일, 최소한 매주 공부할 생각이다.

결과가 어찌될 진 모르지만 나는 수학과 과학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는 방향을 점검하는 용도로 2024년도 모의고사와 수능 시험을 쳐볼 생각이다.

 

 

 

수천 번도 더 잘린 나뭇가지에서
나는 끈질기게 새잎을 내민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꿋꿋이 나는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가지가 잘린 떡갈나무>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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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p6)

그와의 짧은 재회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에게 치유란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활기를 되찾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고, 능동적 여가 활동은 그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p7-8)

그렇게 보면 ‘사랑하고 좋아서’라는 것만큼 확실하고 순수한 동기는 없다. 순수란 말 그대로 다른 것의 섞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지 또 다른 의도가 없다. 즉, 그들이 능동적으로 여가 활동을 하는 이유는 보상이나 결과 때문이 아니라 ‘활동 자체가 주는 기쁨’ 떄문이다. 이러한 순수한 동기에 의해 움직일 때 우리는 외부의 보상이나 위협에 쉽사리 농락당하지 않고 깊은 위로와 행복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여가 활동이란 ‘놀이’다. 그들은 어른의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살아 있고, 삶에 활기가 도는 이유는 제대로 놀 줄 알기 떄문이다.

 

p9)

이 책에서 말하는 오티움은 ‘내적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말한다. 이는 일종의 ‘어른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득이나 책임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고 싶어서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1장 - 지금 우리에게 오티움이 필요한 이유

p19-20)

심리학자 데니얼 네틀의 연구 결과를 보자. 그는 한 사람의 10년 후 행복을 예측하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를 조사해보았다…

우리가 행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위 요소들은 사실상 미래의 행복을 예측하는 데 있어 정확도가 낮았다. 그런데 비교적 정확도가 있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바로 ‘현재의 행복지수’였다. 즉, 지금 얼마나 행복하느냐가 미래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다…

행복을 미루면 행복의 감각은 녹슨다. 행복을 미루는 것이 자동적인 습관이 된다. 그렇기에 애초에 생각했던 어떤 기준이나 조건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행복을 미루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오늘을 희생하면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졌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허락한 만큼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p22-23)

그렇다고 내일 일은 생각하지 말고 오늘만 행복하자는 것은 아니다. 삶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 숙제처럼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을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뛸 수밖에 없다. 지금 일이 싫다는 이유로 당장 사표를 쓰고 하고 싶은 일을 찾으러 다닐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낮에는 개미에서 밤에는 베짱이로, 혹은 평일은 개미에서 주말은 베짱이로 이중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하루의 몇 시간 혹은 주말의 한나절은 자유 시간이 있다. 이 시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p31)

퇴직 후 무기력의 진짜 원인은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 자유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없어서다. 이는 정년퇴직을 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만두기 전까지는 시간만 있으면 뭐든지 해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시간이 주어지면 상당수가 무질서한 생활로 빠져버린다. 당신은 어떨까?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유를 즐기는 것, 놀 줄 아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의 능력이다.

 

p34)

놀이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것은 바로 ‘놀이의 결핍’ 때문이다.

 

p35)

우리가 행복하려면 놀이를 되찾아야 한다. 과정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의 기준은 달라져야 한다. 잘 노는 게 건강이고 잘 놀지 못하는 것은 병이다. 치유 역시 마찬가지다. 치유란 잘 놀지 못하는 상태를 잘 놀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실제 정신과의사인 도널드 위니캇은 심리치료의 목표를 ‘놀지 못하는 상태에서 놀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놀이와 같은 여가다. 여가 시간 아무리 늘어나도 놀이가 없다면 워라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p37)

나는 행복의 핵심이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보는 유심론적 태도를 경계한다. 행복의 핵심은 ‘좋은 경험’에 있다. 그 시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고, 기쁨과 같은 좋은 감점을 안겨줄 수 있는 경험 말이다.

 

p41)

2013년도 8월호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바표된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심리학과 바버라 프레드릭슨 교수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해로운 행복’이란 게 존재한다. 프레드릭슨 교수팀은 면역 조건이 동일한 80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사회적 교류나 성취감으로부터 오는 ‘목적 지향적 행복’과 맛있는 걸 먹는 것처럼 욕구를 단순히 채우는 데서 오는 ‘쾌락적 행복’을 구분해 면역세포에 차이가 생기는지 실험했다. 그 결과 쾌락적 행복을 느낀 사람들은 혈액 단핵구 세포에서, 스트레스와 연관되어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염증발현 유전자(CTRA gene)가 증가하는 반면, 목적 지향적 행복은 이 유전자가 오히려 억제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쾌락적 행복이 목적 지향적 행복에 비해 해로운 것임을 세포조차 알고 있는 셈이다.

 

p43)

그렇다면 좋은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유다이모니아’를 행복이라고 이야기했다. 앞에서 말한 ‘목적 지향적 행복’과 같은 말이다. 이는 순간적인 쾌락이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행동과 통합시켜 자아를 최대로 발휘하는 상태’다. 즉,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을 갈고닦을 때 느껴지는 기분 좋은 만족감을 말한다. 이러한 목적 지향적 행복은 쾌락적 행복과 달리 중독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좋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해로운 행복에 빠지는 걸까? 목적 지향적 행복은 에너지 소모가 크고, 즉각적인 즐거움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당장 즐거움을 주는 손쉬운 활동을 선택한다. 그러나 더 큰 이유가 있다. 많은 이들은 자신에게 좋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기쁨을 주는 활동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탐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가 활동이 왜 중요하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알지만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못 하는 경우가 더 많다.

 

p45)

즐거움과 기쁨은 모두 ‘쾌’의 감정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즐거움, 즉 ‘락’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사고 싶은 물건을 쇼핑할 때 우리는 감각적인 쾌락을 느낀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이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느낀다. 그에 비해 기쁨, 즉 ‘희’는 다르다. 기쁨은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을 말하며 정신적인 것이다. 추운 바람을 맞아가며 겨울 산의 정상에 올라섰거나, 이별의 고통을 겪고 난 후 재회했거나, 밤잠을 쫓아가며 공부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을 떄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즉,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쾌감과 불쾌감을 아우르는 칵테일 감정인 것이다. 이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에 중요한 연료가 된다. 단, 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일 때 그렇다. 즉,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다. 복잡하게도 인간은 ‘감정적 낙차’를 좋아하도록 진화해온 것이다.

 

p49-50)

중독은 오직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삶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상태다. 그 외의 것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다 시들해진다. 알코올, 섹스, 약물, 도박, 쇼핑, 음식 등이 대표적인 중독의 대상이다. 중독자들의 삶은 중독의 대상을 제외하면 빛이 바래져 있다. 중독의 대상에 탐닉할 때만 생기가 돌 뿐 나머지는 온통 잿빛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중독의 대상에 더욱더 매달린다. 그러나 문제는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처음에 느꼈던 즐거움은 옅어진다는 사실이다. 즐거움은 내성이 잘 생기기 때문이다. 같은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

그에 비해 기쁨의 강점은 확장성이 뛰어나다. 기쁨은 기쁨의 대상만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이 주변으로 확산되게 만든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일상까지 생기가 돌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기쁨은 삶의 주름을 펴는 보톡스가 되어준다. 기쁨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은 시들고 인간은 병든다. 우리가 기쁨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다.

 

p52)

행복이라고 다 똑같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에도 엄연히 등급이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순수한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가장 상위의 행복감은 몰입을 통한 성취 경험이다. 즉, 어떤 대상을 향해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노력이 고조되어갈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할 수 있다.

 

p53-54)

오티움라는 말은 라틴어다. ‘오티움’은 여가 시간을 말하고, ‘네고티움’은 여가 외 시간을 말한다. 놀랍게도 라틴어에는 일을 뜻하는 고유의 단어가 없었다. 네고티움이 ‘일’의 의미를 대신한다. 즉, 일은 ‘여가가 아닌 상태’를 뜻했다. 이상하지 않는가? 왜 ‘일’을 뜻하는 독립적인 단어가 없었을까? 지금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정반대의 세상을 살고 있다. 일을 뜻하는 단어는 많아졌지만 오티움을 뜻하는 말은 모호하다. 지금은 ‘일이 없어 남는 시간’이라는 의미의 ‘여가’가 오티움을 대신한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과거 여가 중심의 사회란 일부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p54)

오티움은 ‘무위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걸 말한다.

 

p55)

오티움은 ‘내 영혼에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여가 활동이 오티움은 아니기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나치게 따질 필요는 없지만 오티움을 수동적 여가나 중독과 구분하는 것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1. ‘자기 목적적’이다.
  2. ‘일상적’이다.
  3. ‘주도적’이다.
  4. ‘깊이’가 있다.
  5. ‘긍정적 연쇄효과’가 있다.

 

2장 - 나의 세계를 만드는 휴식

p65)

종종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라고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찾는 거다.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을까? 만약 부모가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해보자. 그러면 경찰서에 가서 우선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신상 착의와 실종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마찬가지다.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잃어버린 나는 어떤 모습이었고,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나를 잃어버렸다는 사람들은 이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나’를 잃어버렸다기보다 애초에 ‘나’라는 사람이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추지 못했기 떄문이다. 즉, 사실은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문제는 ‘자기 상실’이 아니라 ‘자기 결핍’에 가깝다.

 

p67)

자기결정성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본능적인 생물하적 동기 이외에 꼭 충족되어야 할 세 가지 심리적 욕구가 있다고 본다. 이는 자기결정의 욕구, 유능감의 욕구, 친밀함의 욕구다. 이 세 가지 욕구는 생리적 욕구처럼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람이 계속 먹지 않고 계속 자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이 세 가지 심리적 욕구도 계속 박탈되면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생리적 욕구의 박탈이 신체의 병으로 어이지기 쉽다면 심리적 욕구의 박탈은 정신의 병으로 이어지기 쉽다.

 

p68)

그렇기에 좋은 여가의 기준은 이 세 가지 욕구와 맞물려 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참여하는 여가 활동, 자기향상감을 느낄 수 있는 여가 활동 그리고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며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의 여가는 훌륭한 여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오티움이다.

 

p72)

삶을 예술로 보고 자신을 아티스트로 바라보는 관점은 과거 계급사회나 산업화 시대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고 자아와 개성이 강조되는 개인화 시대가 열리면서 이러한 욕구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이를 일찍부터 간파한 심리학자가 바로 에리히 프롬이다. 그는 <건전한 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삶을 창조할 수 없다면 파괴할 순 있다. 삶을 파괴하는 것도 역시 나로 하여금 삶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다.”

프롬은 인간에게는 피조물로 태어난 자신의 상태를 초월하기 위해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려는 창조적 활동의 욕구가 있다고 보았다. 특별한 사람들의 욕구가 아니라 보편적 욕구로서 말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인간이 환경의 억압이나 방해로 인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프롬은 ‘파괴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즉, 프롬은 인간의 파괴성이나 공격성이 창조적 욕구의 좌절에서 기인했다고 본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다. 모든 파괴성이 창조성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다만 창조적 욕구가 짓눌렸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이 될 수 있다.

 

p81)

중년의 위기를 잘 넘어서는 이들은 삶의 외부를 꾸미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내부를 가꾸는 데 치중한다. 즉, ‘꾸밈’에서 ‘가꿈’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이는 작은 차이가 아니다… 우리는 인생의 전반 동안 예쁘게 보이기 위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물속에서 끊임없이 갈퀴질하는 백조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러한 꾸밈이 부질없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는 자각이 피어난다 .그리고 꾸밈에서 가꿈으로 삶의 방식이 바뀐다.

 

p85)

여가는 쉼과 함께 채움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재충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균형이 중요하다. 평소 많이 쓰는 기관은 쉬게 하고, 잘 쓰지 않는 기관을 써야 제대로 된 휴식이다.

 

p90)

“취향이란 인간 그 자체다.” 톨스토이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나를 알려면 내가 무엇에 끌리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p97-98)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라고 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운동을 별로 하지 않는다면 운동을 정말 좋아하는 것일까. 생각이 아니라 경험이 우리를 설명해준다… 실제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일들은 정말 많다. 그러나 그 경험들이 다 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냥 스쳐가는 경험들이다. 적어도 자기를 이루려면 경험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경험’ ‘체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경험은 표면적인데 비해 체험은 한 사람의 일부가 되는 깊은 경험을 말한다. 체럼은 하나의 외부적 사건이 아니라 한 개인이 그 경험을 통해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으로 저장되는 내적 경험을 말한다. 즉, 경험들이 아니라 체험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체험은 감정을 동반하고 감각을 일깨우고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티움은 경험이 아니라 체험이다.

 

p104)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것이 꼭 위대하고 거창할 필요는 없다. 내 영혼이 작은 기쁨을 느끼는 나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 또한 훌륭한 삶이다. 그 시작이 바로 오티움이다.

 

3장 - 나만의 오티움을 찾는 방법

p116)

행운인지 불운인지 우리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삶은 더 이상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되었다. 인생은 너무나 길어져서 몇 개의 직업을 가져야 하고, 우리는 몇 개의 인생들을 살아가야 한다. 그 말은 우리의 정체성 역시 유연해져야 한다는 걸 뜻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 시대에 있어 안정적인 정체성은 건강함이 아니라 취약함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유연해야 하고 시대와 상황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공부해야 한다.

 

p136)

단지 음악을 자주 듣거나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거나 야구장에 많이 간다고 해서 능동적 여가 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감상이 능동적 감상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 ‘기쁨’이다. 매일 땀 흘려 운동을 해도 운동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오티움이 아니다. 그에 비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차분한 행복감에 젖어든다면 이는 오티움이 될 수 있다.

둘째, ‘공부’다. 능동적 여가는 배움의 과정이 있고 난이도가 있다. 날마다 차나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이를 능동적 여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차를 좋아한다면 차의 역사부터 재배법, 종류, 다도 등을 적극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배움의 과정 덕분에 오티움은 깊어진다.

셋째, ‘음미’다. 음미란 어떤 대상의 속 내용을 새겨서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속에 감추어진 의미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공부나 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 것을 능동적 감상이라 할 수 없다. 음악에 집중하고 이를 음미해야 한다.

 

p150)

나를 잘 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과거의 나’이거나 어느 한 면만 바라본 ‘평면의 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기를 공부해야 한다. 자기를 파헤치고, 이해하고, 실험해서 자기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4장 - 오티움이 가져다준 변화

p155)

오늘 사랑을 하게 되면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 아니다. “당신 덕분에 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이 헬렌 헌트에게 한 사랑 고백이다.

 

p155-156)

한 사람이 영혼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오티움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사람이 달라진다. 오티움 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을 사랑하는 나 또한 바뀌게 된다. 많은 사람은 오티움을 접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고 이야기했다.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 기본적인 감정선, 충동이나 감정에 대한 조절 능력, 에너지 레벨, 성격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이구동성으로 했다. 아니, 어쩌면 성격이 바뀌었다기보다 본연의 자신을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에 자신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주위 사람들은 그 변화를 알아차린다. “너, 요즘 뭐 하는 거 있지?”라고 말이다. 그 내적 변화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둘째는 삶에 균형과 활력을 주고, 셋째는 자신에 대한 평가, 즉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p162)

“이 원고를 읽으면서, 환갑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 중학교를 다니시는 고모 생각이 났습니다. 고모는 공부가 정말 재미있다며 하루 종일 자랑하셨는데요. 신기한 건 고모의 머리카락은 온통 백발이었는데, 학교를 다니시면서 모발이 백발에서 점점 흑발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오티움’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p168)

우리는 자기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배우자가 돈을 잘 벌고,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도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기쁨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무리 자기 철학과 지조가 강하더라도 그것이 기쁨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얼마나 삶은 고루할 것인가! 건강한 어른은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억지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p171)

건강한 성인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어릴 때는 울고만 있어도 무슨 일인지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었고 위로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힘들 때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단지 좋은 생각,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부차적이다. 자기 위로의 핵심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쁨’이다. 그 기쁨은 내면 깊숙이 침투하는 고통을 막아낸다. 기쁨은 내면의 보호막이 되어준다. 그 활동이 바로 오티움이다. 그렇게 보면 오티움은 일종의 자기 치유제다.

 

p173)

돌아보면 젊은 날엔 참 외로웠다. 외로워서 누군가를 찾게 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있고 싶어졌고, 혼자 있으면 또다시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혼자라서 외로웠던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웠던 시간들이었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도 서툴렀지만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 외로움과 공허감이 싫었기에 아무나 만나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술로 마음을 달래는 게 전부였다. 지금은 다 지난 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후회도 든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좀 더 나에게 집중할 수는 없었을까?’

 

p175)

좋은 관계란 ‘나, 너, 우리’의 세 세계가 건강하게 기능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건강한 자기 세계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것은 혼자 있는 것을 잘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행복한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행복할 줄 안다. 그것은 기분 좋은 공상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기쁨을 주고 자기 세계 발달시키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오티움이다. 오티움이야말로 혼자 있는 것을 즐길 수 있고,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시간이다. 이들은 스스로 행복을 누릴 줄 알기에 굳이 모든 행복을 관계에서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나를 행복하게 할 책임이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 역시 누군가의 행복을 전적으로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관계 밖에서 행복한 사람이 관계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

 

p181)

왜 인간관계는 우리를 소진시키는 것일까? 그 바탕에는 외향성 선호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려서부터 외향성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내향성을 열등한 것으로 바라본다. 부모는 아이들의 성향은 무시한 채 무리에서 리더가 되거나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문화에서 자라면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맺는 게 아니라 자신을 포장하고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애를 쓰게 된다. 인간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공유관계’와 ‘교환관계’다. 공유관계는 서로의 친밀함과 관심에 기초한 관계인데 비해 교환관계는 서로의 필요와 이익에 기초한 관계다. 즉, 공유관계는 기본적으로 동질감을, 교환관계는 기본적으로 손익에 관계의 뿌리를 두고 있다.

 

p182)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균형이 필요하다. 실제 인간관계에서 소진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상대적으로 교환관계가 비대하고 공유관계는 미미하다.

 

p183)

실제 오티움을 접한 이후로 많은 사람은 관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자아와 관계의 균형을 맞추게 된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낮아지고,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관계를 하기보다 관심사를 공유한 사람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고, 나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린다. 이것이 오티움의 힘이다.

 

p185-186)

좋은 관계의 기준은 정말 간단하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관계가 좋은 관계다. 나와 집단의 관계도 그렇다. 나도 좋고 집단도 좋아야 한다.

 

5장 - 점점 깊어지는 오티움의 힘

p199)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때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는 ‘점진적 과부하’다. 이는 모든 운동뿐 아니라 오티움 활동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이다. 이 말은 ‘과도한 과부하’와 ‘과부하 없는 운동’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웨이트트레이닝 효과를 기대하려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점진적인 과부하를 주어야 한다.

 

p200)

독서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나 읽기 쉬운 책만 본다고 해서 공부의 깊이가 늘지 않는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 서적이나 원서와 함꼐 인접 분야의 책도 볼 필요가 있다. 어려움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진다. 오티움이 과거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의 행복이 되려면 깊어져야 한다. 실력이 늘어야 한다. 실력 향상이란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웃도는 자극과 도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점진적 과부하를 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지 활동 시간을 늘리는 게 아니라 활동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단순 반복식의 습관적인 활동이 아니라 내적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점진적 과부하를 가하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연습은 짜임새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혼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체계를 갖출 때까지 전문가나 선배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순간에는 독립해야 한다. 활동을 스스로 자기조직화해야 한다.

 

p209-210)

슬럼프가 길어지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결과에 대한 기대다. 어느 순간부터 ‘OO보다 잘해야 한다’거나 ‘내 노력이나 기대만큼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기대감을 말한다. 이는 오티움의 본질인 과정의 기쁨을 무너뜨리는 압박감으로 작용한다. 둘째는 매너리즘이다. 점진적 과부하를 통한 기술이나 지식의 향상 없이 습관적으로 활동하다 보면 권태라는 감정에 필히 빠지게 된다. 흥미를 잃는 것이다. 슬럼프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슬럼프를 딛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슬럼프는 대나무의 마디와 같다. 즉, 한 시기의 성장과 다음 시기의 성장을 나누어주는 눈금인 셈이다. 슬럼프는 정체를 의미하지만 어떻게 보면 실력 향상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는 오직 슬럼프를 거침으로써 새로워지고 향상될 수 있다. 슬럼프를 충분히 예상한 이들에게 슬럼프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p215)

실력이 늘수록 지루해하지 않고 집중해서 연습할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진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라고도 표현한다. 특정 분야에서 작은 이득이 훨씬 큰 이득을 발생시키는 일련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연습이 기량을 향상시키고, 향상된 기량으로 더 큰 기쁨을 느끼고, 그렇기에 더 오래 연습을 하고, 나아가 더욱 기량이 향상되는 선순환이 성립된다. 경험이 경험을 부르고, 경험이 열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설적이지만 슬럼프를 환대하면 실력 향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p233)

진짜 오티움이라면 잠깐 쉰다고 해서 영원히 쉬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영혼에 기쁨을 주는 오티움은 그 불꽃이 사그라질 수는 있지만 불씨마저 꺼지지 않는다. 한동안 잊고 지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타오르게 된다. 그것이 오티움이다.

 

p236)

나는 끈질기게 새잎을 내민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꿋꿋이 나는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가지가 잘린 떡갈나무>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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