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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Praiv. 2021. 3. 21.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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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나는 내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위의 두 구문은 나에게 다가오는 책 <데미안>의 모습이다.

 

 

1919년 <데미안> 초판 표지

 

  싱클레어는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교육받으며 자랐다. 싱클레어는 초등학생 시절 프란츠 크로머라는 질 나쁜 친구와 엮이면서 따뜻한 가족, 천국이 있는 기독교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이 때 데미안이라는 친구가 나타나 싱클레어를 어둠의 세계에서 구해준다. 데미안이 이 사건을 알고 나자 프란츠 크로머가 더 이상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데미안이 기독교 세계관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데미안은 성경 속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하면서 기존 기독교 관점과는 사뭇 다른 관점을 이야기한다. 싱클레어의 아버지가 그러한 관점은 이단의 관점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기독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시각인 듯하다. 데미안은 이 이야기를 통해 싱클레어에게 어른들이 쉬쉬하는 세계의 다른 반쪽, 즉 어둠의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무튼 싱클레어의 삶에 데미안이 들어온 것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싱클레어에게 처음 소개되는 지점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싱클레어가 성장하여 20대로 살던 시기는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기였고, 들끓어가던 세계가 결국 폭발하며 부서지는 시기였다. 데미안은 유럽을 억눌린 상태로 표현했다. 인간의 고유한 영혼은 짓밟혔고 대신 그 자리는 사람을 죽이는 데 화약이 몇 그램 필요한지, 공장을 가장 효율적으로 돌리기 위해 몇 명의 사람을 투입해야 하는지 등이 차지하였다. 데미안은 이렇게 억눌린 인간의 영혼이 다시 해방되는 시기가 다가올 것이라 예견했고 깨어있는 자로서 준비되어 있길 원했다. 그리고 곧이어 일어나는 1차 세계 대전을 끝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깨어있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규율에 맞춰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지식이나 종교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당시 세계를 뒤덮고 있던 이념들, 종교적인 규율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것”, “각자의 마음 속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다.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고 독립된 사람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깨뜨려야 날 수 있다. 세계를 깨뜨리고 날게 된 인간은 아브락사스에게로 간다. 선과 악, 남자와 여자의 혼합, 성스러움과 충격의 뒤섞임, 쾌감과 공포, 연약한 순결을 관통하는 깊은 죄악, 천사인 동시에 악마이고, 최고의 선이면서 극도의 악인 존재에게로. 이 장면은 깨어난 자가 더 이상 선과 악을 구분짓지 않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깨어난 자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이상을 생각하는 존재이다.

 

 

<몬스터 콜>

 

  <몬스터 콜>이라는 영화에선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이란 복잡한 동물이야.

신부를 죽인 살인자였던 왕자는 또한 좋은 왕이었지.

고집불통이고 무례했던 약제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약을 팔았지.

사람들에게 다정했고 딸을 사랑했던 목사는 믿음 없는 목회자였지.

네가 할 일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을 말하는 거야.

단지 그 뿐이야. 하지만 결코 쉽진 않을거야."

이 대사처럼 인간의 삶은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뉘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모든 사람은 좋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나쁜 사람일테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더 우리를 둘러싼, 혹은 가두고 있는 알을 깨고 본연의 자아로 살아가야 한다.

 

  <데미안>을 읽으며 나를 나답게 만들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의 규율들, 게으름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왔던 관습들, 그 모든 이분법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책에 나온 것처럼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을 구분하는 생각은 지켜져야 한다. “금지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인간 자체를 죽이는 짓이니까. 하지만 사회에서 인정받는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가고, 유교 기독교 불교등의 규율을 따르고, 지금껏 지켜온 관례를 열심히 따르고, 한 사회의 특정한 생활 양식에 스스로를 맞춰 살아가는 것이 본래의 나를 억누르는 건 아닐까?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억눌렸던 인간 본연의 영혼이 결국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처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게 억눌린 채 스스로를 죽이고 있진 않을까?

 

  우리는 본연의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적어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금붕어나 개, 고양이까지만 진화한 채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써버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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