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KorSA

공허함에 빠진 이들에게 - 전념(Dedicated) 본문

Books/My Interests

공허함에 빠진 이들에게 - 전념(Dedicated)

Praiv. 2022. 1. 25. 22:28
320x100

전념(Dedicated)

전념(Dedicated),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삶이 공허한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생각의 큰 틀을 바꿔주는 동시에,

열심히 살고 바쁘게 살아가느라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구원해줄 책이기 때문이다.

 

 

# 액체 근대

 

폴란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사회를 “액체 근대” 라고 불렀다. 바우만은 현대인들이 어느 한 가지 정체성, 장소, 공동체에 스스로 묶어두기를 원치 않으며, 그래서 마치 액체처럼 어떠한 형태의 미래에도 맞춰서 적응할 수 있는 유동적 상태에 머무른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어느 하나의 직업이나 역할, 생각이나 신념, 집단이나 기관에 매달려서 오랫동안 같은 형태로 머무르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도 우리를 진득하게 품어주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선택지를 열어두는 것, 이것이 바로 액체 근대다.

 

액체 근대 속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움과 변화하기를 원한다. 지금 직장에서도 이직을 고민하며, 지금 공동체에서도 다른 공동체로의 이동을 고민한다. 결국 “지금” 이순간의 것에 집중하고 헌신하지 않기에 지금의 직장, 지금의 공동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기되고 방치된다. 관리해주어야 할 사람이 관심을 주지 않거나 이미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 액체 근대 사람들은 행복할까?

 

그렇다면 액체 근대 속 사람들은 행복할까.

 

처음엔 해방감이 주는 자유가 달콤하다.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경치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 신선하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누구와도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으며,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고립감을 경험한다. 무엇을 꿈꿔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에 만족해야 하는지, 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을 얻지 못해 괴로워한다. 무의미, 무관심, 허무주의에서 오는 절망감을 경험한다. 뒤르켐은 이러한 유형의 자살을 ‘아노미적 자살’이라고 불렀으며, 그 뒤에 깔린 감정을 ‘아노미’라고 불렀다. ‘아노미’는 삶을 조직할 수 있는 기준이나 법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삶에서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아노미’를 좀 더 편하게 말하면 ‘지나치게 쿨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 행복으로 가는 길, 전념

 

책의 저자인 피트 데이비스는 이러한 액체 근대의 비극을 겪지 않는 길이 ‘전념하기’라고 말한다.

 

 

“전념하기의 핵심은 시간을 통제하는 것에 있다. 죽음은 삶의 길이를 통제한다. 그러나 삶의 깊이를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전념하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시간을 인정하는 대신, 제한 없는 깊이를 추구하겠다는 결정이다.

 

 

# 사람들이 전념하길 두려워하는 이유 3가지

 

사람들이 무언가에 전념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다.

무언가에 전념했다가 나중에 다른 것에 전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까 걱정하는 ‘후회에 대한 두려움’,

무언가와 깊게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정체성, 평판, 통제감이 위협받을까 걱정하는 ‘유대에 대한 두려움’,

헌신으로 인한 책임감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것들을 경험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들이다. 

 

후회할까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려면 선택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념하기를 결심했다고 해서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전념하기를 주장하는 것과 상반되게 느껴지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전념하기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그래야 부담감 없이 전념하고자 결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후 몇 가지 단계를 더 거쳐 후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우리는 목적의식이 주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목적의식이 있는 사람은 상황에 끌려가기보다 먼저 나서서 상황을 주도한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외적 가치보다 내적 가치에 집중한다. 세상을 소비하기만 하는 소비자가 아닌,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생산자가 된다. 전념하는 사람들은 원대한 포부를 품으려면 이기심만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한다.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사람들 대부분이 말로는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실천하지 못하는, ‘불굴의 삶’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자유의 허상에 불과하다. 반면 목적은 “세계 안에서의” 자유를 허락한다. 목적이 주는 자유는 자유의 허상보다 훨씬 심오하다. 

 

유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때는 우리가 “자아”를 보는 관점을 고정적인 대신 유동적으로 보는 관점이 도움이 된다. 이 관점은 자신의 자아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뻣뻣한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체성은 고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또한, 유대를 맺음으로써 평판이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윤이 나며, 통제감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아는 “심어진” 것이며, 이는 전념하기의 여정을 통해 드러난다.

민주주의 이론가 존 듀이는 “자아”와 “사회”가 완전히 별개의 독립체라는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듀이의 관점에 따르면, 자아는 일정 부분 사회에 의해 구성된다. 듀이에게 자유는 사회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를 통한 자유를 의미한다. 사회와 자아는 서로 공생한다. 우리가 사회를 형성하고 사회가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무언가와 유대를 맺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타인이란 존재는 귀찮고, 성가시고, 지나치게 요구하고, 강요하고, 오해하고, 실망하고, 겁주고, 잘난 척하고, 판단하고, 말이 많고, 상처를 주고, 비난한다. 그러나 혼란 없이 세울 수 있는 공동체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산전수전 겪고 나면, 새롭게 만들어진 이 공동체는 우리에게 연대라는 선물을 준다. 연대란 나보다 더 큰 무언가에 헌신할 때 반대로 나도 그 무언가의 헌신을 받는다는 뜻이다. 연대는 나를 고체 인간을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고체 사회의 일부가 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연대가 주는 선물이다.

 

마지막으로 고립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고를 수 있었던 다른 선택을 아쉬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념하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있었을 모든 새로운 순간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전념하기 때문에 포기한 경험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 펠릭스 비더만은 새로움과 목적, 이 두 가지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무리 즐겁고 흥분되는 새로움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루함으로 수렴한다. 반면 목적은 이와 반대로 작용한다. 처음에는 재미있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바래는 새로움과 달리, 목적은 대개 지루하게 시작해서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 새로움이 삶의 원동력인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것을 놓칠까 봐 늘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목적이 삶의 원동력인 사람의 두려움은 그와 다르다. 유행하는 새로운 것만 좇다 보면 깊이 있는 경험을 놓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이 있는 사람들, 즉 깊이 전념한 사람들은 자신이 새로움과 깊이를 맞바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깊이가 곧 궁극적인 새로움이라고 말했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새로움이 아닌, 목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통제력을 얻는다. 빛나는 것을 쫓는 대신 자기 스스로 ‘빛나는 것’이 된다. 깊이 전념하는 사람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자 하면 누구도 그를 움직일 수 없다. 반면 그가 세상을 움직이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그들은 세계를 들어 올릴 힘을 갖고 있다. 꾸준히 한 가지 목적을 추구할 때 뒤따라오는 깊이는 그야말로 초능력이다. 

 

# 전념하는 사람들이 모인 세상을 기대하며

 

우리가 스스로 전념하는 자가 되고 주변에도 전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분명 우리의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무한 탐색의 가치가 전념하기의 가치보다 훨씬 더 지금의 세계를 주름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돈이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돈이 그 한계를 벗어나 문화 전체를 장악하면서 논리가 뒤집혔다. 돈이 곧 목적이 된 것이다. 반면, 좋아하는 일, 물건, 건물, 재능, 기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사람까지도 전부 돈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돈은 우리가 애정을 쏟는 특정한 것들을 액체화한다. 

돈을 버는 것이 최상위 목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삶을 이루는 특정한 ‘고체’를 전부 ‘액체’, 즉 금전적 가치로 환산한다. 한때는 내 마음과 시간을 잔뜩 쏟았던 소중한 것들이 이제는 얼마든지 돈과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돈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이 똑같은 비중을 갖고 떠다닌다. 

돈 이외에도 명예의 관점에서 무한 탐색의 기조가 만연해있다. 기관들은 특정한 목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멈췄고 도덕성을 가르치는 대신 중립의 위치에 섰다. “특정 사명을 위해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념하기를 동반하지만 지금 사회에서 구성원들에게 이를 요구하는 건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기관들은 “효율성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영속농업학자 욜리네 블라이스는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상태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자율을 향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세상에 주인의식을 갖지 않고, 경제 또는 시민 생활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소유주, 생산자, 시민이 되는 대신 피고용자, 소비자, 고객으로만 남으면 이중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다. 책임감은 덕목과 가치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경작한다. 전념하기 반문화를 가진 구성원들은 무관심하기를 거부한다. 명예의 문화를 조성하고 돌보며, 좋은 일을 축하하고 나쁜 일을 비판한다.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내세우고 인정해 주지만, 그것이 성취인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는 자리라는 사실을 잘 이해한다.

 

전념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그러나 대담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후의 선택들은 훨씬 쉬워진다. 원칙과 목표와 경험칙을 얻음으로써 미래의 분기점에서 길을 찾을 때마다 참고할 수 있는 지도가 생긴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념을 뜻하는 ‘dedicate’는 ‘무언가를 신성하게 하다’와 ‘오랫동안 무언가에 전념하다’ 이렇게 두 가지 뜻이 있다. 헌신함으로써 우리는 몇몇 특별한 순간을 신성하게 한다. 그리고 그 헌신을 유지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평범한 순간까지도 신성하게 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이란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즐거움도 물론 좋지만 의미가 없는 삶을 산다면, 그 공허함과 허무함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액체 근대 속 고체 인간이 되기로 결정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 참고 영상

 

* 저자의 연설> https://www.youtube.com/watch?v=nkqmXK-szi0 

* 체인지 그라운드> https://www.youtube.com/watch?v=VFJxF6QqSus 

 

 

 

 

728x90
728x90
Comments